얼마 전 경북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을 다녀왔다. 서원이라고 하니 어림잡아 조선시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인 것은 알았으나, 서당과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잘 알지 못했고, 그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문화유산이라는 것만 알고 찾아간 것이다. 여행 이후에 서당과 서원의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니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았다. 조선시대 서원과 서당의 차이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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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書院)이란?
서원이란, 조선시대에 지어진 제사와 교육을 담당하던 지방 기관으로, 사림 즉 사대부를 대상으로 유학을 가르치고 옛 유학자들을 모신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내가 방문했던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최초의 유학 교육을 위해 세워진 '백운동서원'이 시초이며, 1550년에 최초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소수서원'이라는 현판과 서적, 노비등을 지원받은 '사액서원'이다.
서원은 크게 그 기능에 따라 3가지 공간으로 나뉘는데, 유학자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 유생들을 가르치는 강당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숙식하는 동재와 서재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에게 유명한 퇴계이황은 일반백성과 사림, 즉 학문을 연구하는 사대부의 제자들이 나뉘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담당할 주체인 사림을 올바른 방향으로 키워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그의 노력으로 인해 서원은 그 타당성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았으며, 소수서원이 사액서원, 즉 국가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는 서원이 된 이후, 조선 지역 곳곳에서 서원이 세워지면서 숙종 때에는 무료 131개의 사액 서원이 생겨나게 되었다.
서원의 발달과 폐단
서원은 명종때 건립되기 시작하여 선조에서 현종에 이르는 시기까지 크게 발전하였고, 숙종에서 영조 초까지 그 숫자가 무려 1,000여 개에 이르면서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결국 영조 17년 이후 많은 서원이 철폐되고 쇠퇴하기에 이른다.
서원이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선조때에 들어 우후죽순 생겨난 서원이 사림의 강력한 집단 권력의 매개체가 되면서 붕당정치가 도래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붕당정치란, 정치적 견해가 아닌 학문적 유대와, 지연, 학연에 따라 구성된 양반들의 정치집단을 뜻하는데, 이들의 성장 매개체가 바로 서원이었고, 당세 확장의 방법으로 지방별로 사원을 세워 그 지역 사림과 연결을 맺고 자기 당파의 우익을 확보하려 하였다.
또 한가지 문제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이 늘어나면서 국가의 재정부담을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사액서원으로 지정되면 국가에서 노비, 서적이 지급되고 세금도 면제해 주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여러모로 국가의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었다.
결국 영조때에 이르러 서원철폐를 단행하게 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서원의 일대 정리에 착수하게 되면서 1,000여개에 달하던 서원은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훼철(헐어버림.)하게 된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서원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서원이 백성을 괴롭힌다면 공자가 살아 돌아 온다해도 용서치 않으리라."
서원의 역할과 한계
서원은 조선의 학문, 특히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키고 인재를 길러내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방 양반들의 세력을 이루는 근거지 역할을 하면서 주변 농민들과 국가에 큰 부담을 준 것도 사실이다. 농민들에게 땅을 헐값에 팔게 하거나 서원 토지내에서 농사를 짓게 하는 등 농민을 괴롭히는 지주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당(書堂)이란?
서당 역시 조선시대 발전한 교육기관의 하나로, 국가에서 세운 향교나, 사림(사대부)들이 세운 서원과는 다르게 일정한 규칙이나 조건 없이 마을 곳곳에 자유롭게 민간인에 의해 세워진 보편적인 초등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로운 운영 속에서 서당은 조선말기까지 운영되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서당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광복 후 <교육부> 제정에 따라 서당의 교육기능은 학교로 모두 이전되었다.
서당의 한계와 쇠퇴
서당은 획일화된 운영 체계나 주체, 혹은 규정이 따로 없고, 마을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그 용도와 성격이 정해졌다. 또한 마을의 특성과 수준에 맞추어 교육의 내용이 변화될 수 있었고, 주로 7세에서 16세까지 학생들이 가장 많았다. 주로 <천자문>을 통한 한자 학습과 <명심보감>, <소학>, <사서삼경> 등을 통해 유학을 배웠다. 서당을 나온 이후에는 향교나 서원, 혹은 과거를 치뤄 성균관으로 옮겨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 조선말기에는 서당교육의 내용이 점차 부실해지고 형식에 그치게 되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서당교육을 편입, 체계적으로 운영해야한다는 움직임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당시 국가재정과 관료조직의 성격 때문에 현실화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러다 19세기 말 근대적 교육의 전개와 함께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점차 쇠퇴되었다.
서당의 역할과 의미
서당은 특별한 규제와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후기에는 상민들도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서당에 보내게 된다. 몰락한 양반들도 많아져 이들이 생계를 위해 서당을 차리면서 서당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활발한 교육활동이 진행되면서 양반에서부터 일반 서민에게까지 인륜도덕과 존중 등 유교사상의 긍정적인 가치와 규범을 실제생활로 실제 반영되는 초석이 되었다. 이는 그당시 서당이 단순히 학문적 지식만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유학이 요구하는 인격체를 완성하는 전인교육(全人敎育)으로써 그 역할을 다한 것이라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