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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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은 영화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뒀지만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영화의 OST는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특히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딸아이 학교에서도 담임 선생님이 이 곡 계이름을 알려주며 음악시간에 리코더 연주를 해보았다고 했다. 딸아이 역시 이 곡을 수천번도 더 들어서 (그것도 내 폰으로) 나 역시 너무나도 익숙한 곡이 되었다.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곡을 곡 자체로만 즐겼다고 해야하나. 

영화 상영이 끝나고 kt올레에  VOD로 나오기만을 기다렸으나 흥행에 큰 성공을 해서인지 생각보다 빨리 출시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지난주에 딸아이가 VOD가 올라온 것을 보고 소리쳤다. 

 

"엄마!! 스즈메, 스즈메에!!"

 

드디어 일요일인 어제, 저녁밥을 먹은 후 7살 아들, 10살 딸과 함께 우리는 TV 앞에 앉았다. 

그리고 2시간 넘게 이어진 영화가 끝난 후 우리는 셋 다 여운에 잠겼다. 아들은 나와 같이 눈물을 흘린 듯했고 딸아이는 너무 재미있다며 웃고 있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영화에 대한 감상을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10년 전쯤인가? 고등학교 은사님께 추천받아서 보았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늑대아이를 보고 추천해 주신 선생님께 이메일을 쓰면서 영화에 대한 리뷰를 짧게 했던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두 애니메이션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확실히 다르지만 자연과 인간, 아니 거대한 자연 속의 미미한 인간의 존재를 말하는 본질은 비슷한 것 같다. 

 

여기까지만 읽고,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아래 글을 읽지 말고 영화를 한 번 보기 바란다. 내용이 모두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보신 분들만 본인의 생각과 함께 내 리뷰를 비교해 보면 좋겠다. 

 

 스즈메와 소타, 그리고 다이진

 

이 세 등장인물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셋을 삼각관계라고 명료하게 정의하고 싶다. 삼각관계라고 하면 흔하디 흔한 드라마의 로맨스 정도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조금 결이 다르다. 분명 이 셋은 그러한 애정의 트라이앵글 위에 위치해 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 세상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 연결 구도인지도 모른다. 

 

삼각관계라는 것이 꼭 '미혼'의 '남자와 여자'만의 그리고 '사랑'만의 문제는 아니다. 스즈메와 소토만 놓고 본다면 미혼 남녀의 사랑의 감정이라 할 수 있겠지만 다이진이라는 신 혹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힘을 가진 어떤 존재 (때로는 그저 고양이일수도)가 그 사이에 들어감으로서 일반적인 사람 사이의 삼각관계라고 볼 순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잘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인간들끼리의 관계와 소통만으로 살지 않는다. 동물이나 식물 등 다른 대상이 그 안에 들어올 수도 있고 깊은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신이나 어떤 위인을 숭배하고 따르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가 일대일이 아닌 일대 일대 일의 관계에서는 누군가는 소외되거나 희생(이별)되어야 한다. 일상에도 마찬가지다. 나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대상의 숫자가 3이라면 평등한 감정과 물질의 나눔이 어려워진다. 셋이서 뭉쳐 다니는 친구끼리도 트러블이 종종 생긴다. 먹을게 셋 이면 두 사람이 정확힉 나누기 애매해진다. 형제가 셋이면 한 명은 꼭 소외외감을 느낀다.   

 

스즈메와 소타, 두 사람의 사랑(영화에서는 '좋아하다'라 모든 감정을 말하지만, 나는 사랑이라 하겠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사랑 사이에서 희생되는 인물은 바로 스즈메가 자신의 손으로 구해 준 다이진이다. 다이진은 자신이 요석일 때 뽑아준 스즈메를 사랑하게 되지만, 스즈메는 소타를 의자로 만들고 뒷문을 열고 다닌다고 생각한 다이진을 미워하고 결국 소타를 요석으로 만든 다이진을 증오한다. 하지만 다이진이 사실은 스즈메와 소타가 찾아다니는 일본 내에서 자연재해가 일어났던 곳들의 뒷문을 찾는데 도움을 준 사실을 뒤늦게 안 스즈메가 고맙다고 하자, 그 즉시 오직 스즈메를 위해 다시 소타 대신 요석이 된다. 

 

어쩌면 뻔한 사랑의 결말일 수 있다. 해피엔딩을 위해 조금 덜 중요한 인물이 희생되는 것은 말이다. 하지만 대재앙을 맡기 위해 인간이 아닌 동물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두가지 상반된 측면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살고 싶다, 조금 더 살고 싶다'는 두 주인공의 간절한 바람이 다이진에게는 왜 없었을까. 다이진의 희생은 인간의 이기가 끝까지 표현된 것일 수도 있다. 

또 한가지는 고양이 두 마리가 요석이 되어 재앙을 막는다는 것은 일본이 전통적으로 고양이라는 동물을 운과 재물의 상징으로 여기는 탓도 있지만 어떤 동물이 되었건 간에 인간이 아닌 고양이가 대재앙을 막는 요석이라는 설정은 인간은 결코 자연의 변화를 거스를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자연재해 

 

계속되는 지진의 피해를 막기 위해 멋 옛날 선조들은 일본에 두 개의 요석을 박고, 이후 스즈메가 실수로 그 요석을 뽑고 만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연재해를 완전히 막을 수 없음과 동시에 어리석은 인간의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지 않아야 할 재해까지 발생하고 만다. 지구에 얹혀살면서 이 지구의 최고 지배자인 양 행동해 온 인간의 행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이 아닌 다이진, 즉 동물을 통해 자연재해를 다시 막게 하는 설정은 자연에 굴림하려는 인간의 미미함과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동물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결국 동물, 즉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에 순응하는 생명체만이 이 지구를 지킬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웃, 그리고 일상의 소중함 

 

 

스즈메와 소타가 뒷문 단속을 하러 일본 곳곳을 다니면서 만난 이웃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들은 평범한 그들의 일상으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스즈메를 초대하고 또 그녀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그것도 스즈메가 정확히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러 다니는 지도 모른 체 그저 '좋은 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거란 믿음 하나로 말이다. 결국 이들은 스즈메와 소타의 도움으로 엄청난 대지진을 피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까지도 스즈메는 소타의 친구인 세리자와 토모야의 도움을 받아 그녀의 고향까지 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스즈메 이모의 극진할 보살핌이 있었기에 엄마를 잃고도 씩씩하게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스즈메와 소타가 뒷문을 닫으려 할 때마다 영상을 가득 채웠던 일상의 목소리들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안녕.", "안녕히 주무셨어요?", "다녀오겠습니다.", "잘가.", "잘 먹겠습니다.", "잘 자.", "내일 보자"...

 

어쩌면 그 어떤 의미도 담고 있지 않았을 우리의 습관적인 인사들. 매일 하던 그 인사들이 때로는 지겹고, 귀찮고 또 때로는 빈 껍데기뿐이었겠지만 저 세상에서의 이 세상 인사들은 다시 내뱉지 못할 사랑과 감사의 언어인 것이었다. 태어났기에 살아내는 것이 당연하고 특별할 것 없었던 그녀에게, 그리고 그 영화를 만난 현실의 우리들에게, 뒷문을 열면서 마주한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엄마의 품처럼 벗어나고 싶지 않은 포근한 곳이었다.  

 

죽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던 스즈메. 엄마를 잃은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살면서 어쩌면 그녀는 죽음이란 언젠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세상처럼 익숙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소타는 처음으로 그녀가 이 세상에 좀 더 머물기를 간절히 바라게 한 인물이다.

평범한 일상과 그 일상 곳곳을 보일 듯 보이지 않게 채우고 있는 사랑. 이 두 가지가 이 영화에서 말하려고 하는 가장 큰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생각보다 빠른 전개와 화려한 영상으로 2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7살 아들래미까지도 집중해서 감상했다. 아직도 이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올해가 가기전에 방구석에서라도 꼭 감상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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