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키우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들과 그 자식 세대인 우리가 자식을 키우는 방식은 너무나도 다르다. 고작 30년 사이에 이렇듯 육아가 하드캐리 중에서도 단연 최고봉 자리에 올라가게 된 것은 단지 여성의 사회진출로 인한 워킹맘들의 고단함이 아우성치듯 쏟아져 나왔기 때문일까.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아이의 어떤 점 때문에 육아가 힘든지를 생각해 보는 게 필요하다.
아이를 키우는 데에 있어 가장 많은 고민들 중 하나가 바로 아이의 "예민함" 일 것이다. 이 단어 하나가 아이의 거의 모든 행위에 반영이 되는데 주로 아래 행동들이 대표적이다.
입맛이 까다로워서 밥을 잘 안 먹는 아이
소리에 예민해서 잠을 자도 자주 깨는 아이
촉감이 에민해서 조금만 거슬리는 장식이 있는 옷을 입어도 불편하다가 내동댕이 치는 아이
낯선 곳, 낯선 사람들을 싫어해서 놀이터에서도 구석서만 노는 아이
집 화장실이 아니면 절대 볼일을 보지 못하는 아이
한겨울에도 신발만 벗었다 하면 양말까지 벗어던지는 아이 등등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 언제쯤 나아질까?
그 중에서도 식사와 관련된 아이의 예민함은 삼시 세끼 혹은 최소 두 끼 이상 해 먹여야 하는 엄마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아닐 수없다.
지금은 열 살이 된 우리 딸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화가 났던 건 이전에 분명 맛있게 먹었던 음식인데도 어떤 날은 전혀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원래 자기는 그 음식을 싫어했다는 거다. 이렇게 어이가 없을 수가! 분명 나는 그때와 동일한 음식을 열심히 만들어 내왔는데 자기는 원래 싫어하는 음식이라고 잡아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코로나로 인해 모든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1년여 가까이 장기 휴원에 들어갔을 때를 모든 엄마들은 기억할 것이다. 삼 시 세끼도 모자라 간식까지 하루 두 번 혹은 수시로 준비해야 하는 일은 마치 온종일 부엌에만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뭐든 잘 먹는 아이를 본 적 있는는가?
그런 건 인스타에서나 보았던 것 같다.
우리 딸은 몇 가지 좋아하는 음식이 딱 정해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달걀 프라이다.
딸아이가 일곱살 때 딸애 친구네 집에 가서 놀다가 저녁까지 먹고 온 적이 있었는데, 딸은 저녁으로 시킨 피자를 언제나처럼 전혀 먹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집 엄마가 급하게나마 달걀 프라이를 해 주었는데, 그거 하나만 가지고도 밥을 두 그릇이나 먹은 것이다. 그걸 보는 내내 친구 엄마는 입을 다물지 못하며 연신 "이럴 수가!"를 외쳤다. 그 집 엄마 눈에는 우리 딸이 한 가지 반찬으로도 밥을 뚝딱 해치우는 기특하면서도 놀라운 아이였던 것이다. 매일 음식을 차리는 내 입장에서는 다양한 반찬을 해서 영양학적으로 밸런스를 맞추고 싶은데, 몇 가지 특정 음식만 고집하는 딸애의 까다로움에 속을 썩이는데도 말이다.
그러던 아이도 조금씩 변해갔다.
열 살이 된 딸아이는 지금도 조금씩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의 가짓수를 늘려가는 중이다.
유치원에서도 김치는 나왔었지만 초등학교 2하년까지도 학교에서 나오는 김치 반찬을 전혀 먹지 않았는데, 이제는 생김치 말고 볶음 김치 정도는 잘 먹을 수 있게 되었고 특히 김치전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생선은 그냥저냥 먹는 아이였는데 지금은 고등어구이라면 밥 두 그릇은 무조건이다. 아직까지 브로콜리나 시금치 같은 초록색 야채를 잘 먹진 않지만 볶음밥에 애호박이나 파프리카를 넣어도 걸러내지 않고 잘 먹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험'하게 되는 음식이 많아지니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많아졌다. 결국 시간이 약.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성향인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알아서 찾아 먹으리.
인사 안하는 아이, 언제쯤 나아질까.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하면서 가장 난감해할 때가 어른을 보고 인사를 하지 않을 때 일 것이다.
친구 엄마들을 만나도, 동네 어른을 만나도, 심지어 조부모나 일가 친척을 만나도 엄마 뒤로 숨기 바쁘지 야무딱지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고민을 늘어놓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나 역시도 그게 걱정이었다. 무엇보다 부모가 욕먹는 것 같아 창피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여섯 일곱살에도 하지 않던 배꼽 인사를 지금 하고 다닌다. 나도 사실 이 모습을 보고 놀랐는데, 딸아이의 인사하는 모습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아이고~ 인사도 잘하네" 하며 감탄을 한다.
보통 초등학교 1,2학년 때 까지도 아이들이 인사하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어색한 생각에 우물쭈물하다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런 모습들이 길어진다고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생각해 보면 중고등학생이나 다 큰 어른이 조부모나 지인들을 보고 인사를 안 하고 무시하는 경우를 보았는가?
결국 인사라는 것은 '말'로 교육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 역시 부모의 모습을 보고 배우고, 또 스스로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오히려 부모 본인이 창피한 생각에 옆에 있는 아이를 대놓고 다그치면 아이는 인사하는 것을 더 어려워 할 수도 있다. 특히나 가벼운 인사 외에 어려운 인사를 요구하는 경우를 보았는데, 어느 날 아파트 단지에서 두 아줌마가 대화를 듣게 되었다.
한 아줌마는 팔을 다쳐서 깁스를 하고 있었고, 친구로 보이는 다른 아줌마가 대화를 마치고 헤어지려는 순간에 옆에 서 있던 초등학교 1학년 쯤 돼 보이는 아들에게"이모, 어서 팔 나으세요"라고 말 해야지 뭐 해?"라고
그런 말은 나중에 집에 따로 와서 해도 될 일이었다. 굳이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식의 예절 교육을,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인성인양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아무리 어리더라도 잠시 무안했을 그 아이의 쭈뼛한 모습에 안쓰러웠다.
인사는 직접 보고 직접 해 봐야 하는 운동과도 같다.
부모가 상황에 맞는 인사를 잘 하면 그 아이들은 백 프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된다. 누구보다 부모 자신을 먼저 돌아보자.
낯선 곳을 두려워 하는 아이, 언제쯤 나아질까.
사실 이 부분은 20대, 혹은 30대를 넘어가야 조금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 역시 지금 우리 딸이 그랬듯 낯선 곳,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사람이었다. 특히 학창 시절 새 학기가 될 때마다 나는 거의 여름방학 직전까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거의 2학기가 시작되어서였다.
유치원, 그리고 초등 1,2학년때까지는 단짝 친구란 개념보다는 이 친구 저 친구와 되는대로 어울리는 성향이 크기 때문에 굳이 친한 친구 이름을 대지 못하더라도 크게 아이는 외롭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3학년 정도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놀고 싶은 아이가 생기고, 또 놀기 싫은 아이가 생긴다. 무리가 지어지고 그에 따라 혼자인 아이들도 눈에 띈다. 이러한 성향이 계속된다 해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친구를 동시에 사귀는 것보다 진심 어린 두 세명의 친구를 사귀는 것도 하나의 사교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예민한 "친구 고르기"에 부모가 예민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아이를 위로한답시고 "걔는 좀 그렇네.", "걔가 이상하네" 라며 부모가 친구를 판단하는 발언을 하거나 친구 사귀기를 어려워하는 아이를 '잘못'한 행동인 듯 나무란다면 아이의 자연스런 대인관계 형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부모가 너무 걱정하고 캐묻고 간섭하기 보다는 묵묵히 지켜봐 주고 아이의 고민에 공감해 주면서도 "그럴 수 있다"라는 반응으로 무심한 듯 흘려보내자. 그리고 어떤 인간관계 방식이든 옳고 그른 것 없다는 것을 부모 역시도 알아야 한다. 잘 알지 않은가? 인간관계라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뿐더러 아무리 믿음이 강했던 사이라도 한순간에 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 사회 생활을 하고 더 다양한 사람과 만나면서 조금씩 낯선 곳에 적응하는 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 만약 거기에 여전히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게 나쁜 게 아니다. 다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얼마나 주도권을 갖고 내 인생의 양분으로 삼을 수 있느냐이다. 꼭 무언가를 주고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으로 인해 내 주체성이 흔들리고 내 삶이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살아보니 그렇더라.
종합해 보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아이가 어릴 때 너무 예민해서 고민이라는 것이 말이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사춘기를 지나고 성인이 된 자식을 부모가 얼마나 바꿀 수 있겠는가? 그에 반해 유아 청소년기의 우리 아이들은 부모가 조금만 기다려주고 따쓰하게 안아주면 이후에 "아, 내가 별 것 아닌 걸로 고민을 했구나?"라고 깨닫게 될 것이다.
요즘 육아가 더욱 힘든 이유
초반에 했던 얘기로 돌아가 보면, 요즘 육아가 힘든 이유에 대한 답을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는 물론 여러 사회적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엮여있다. 스마트폰 중독으로 인한 아이들의 정서적 발달 문제, 흉악 범죄 증가로 인한 안전의 문제,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어린이 보호구역 교통사고와 세월호 사건 및 이태원 참사와 같은 사회 안전망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재앙등, 이전에는 없었던 어려움들 말이다. 여기에다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는 물론 급변하는 직업의 세계 등 아이의 미래를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변화등이 더욱더 부모를 불안하게 한다. 그리고 그 불안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과도한 노력으로 작동하게 되고, 이러한 예민함이 결국은 육아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것 아닐까.
부모의 예민함.
아이를 예민하게 하는 건 결국 부모의 관심과 사랑으로 포장된 불안과 예민함이라는 것이 평범한 엄마로서의 내 생각이다.
참 어렵다. 기다려주는 것. 아이를 바라보는 것.
걱정 어린 잔소리 대신 아이를 한 번 더 안아보자.